• 성지의미
  • 순교성인·복자
  • 순교자 337위
  • 연도별 순교약사

HOME > 순교발자취 > 순교성인·복자·하느님의 종

순교 성인

손자선 토마스는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에서 3대째 천주교를 믿으며 순교자를 배출한 열심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고 며칠 후, 포졸들이 거더리 마을에 들어와 신자 집을 샅샅이 뒤져 많은 물건을 빼앗아 가면서, “손씨 집안에서 누구든 사람을 보내 몰수된 물건을 찾아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고 용감한 손 토마스가 자진하여 덕산 관가에 나가서 찾아온 사유를 밝혔다. 이 때 관장이 그에게 천주교인인지 묻자, 그는 자기가 천주교 신자임을 밝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관가에서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고, 곤장을 치다 못해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토마스의 입에 여러 가지 쓰레기를 쏟아 부으면서 조롱하였지만 토마스가 굴하지 않자 덕산 관장은 그를 해미로 압송하였다.

그는 해미에서 두 다리가 부러질 만큼 더 심한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을 지켰으며, 마침내 공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공주에서 관장은 특수한 수단을 생각하여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써 이빨로 너의 손 살점을 물어뜯어 보아라.”고 하자, 토마스는 즉시 자신의 양팔을 물어뜯어 피가 흐르게 하였다.

결국 토마스는 공주 옥으로 이송되어 1866년 3월 30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68년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되고 1984년 5월 3일 서울 여의도에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순교 복자

이국승 바오로는 충청도 음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다.
장성한 뒤 충주 지역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된 그는 경기도 양근으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에게서 교리를 배우고는 은총으로 마음이 움직여 교회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이 바오로는 충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으나 심한 형벌과 문초 끝에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는 잘못을 뉘우치고 극기와 고행으로 보속하는 한편,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자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 후 혼인을 재촉하는 부모를 피해 한양으로 이주한 그는 최창현(요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교리를 익혔으며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고,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도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된 바오로는 황해도 출신의 고광성이 배교하고 옥문을 나서려 하는 것을 보고 권면했고, 고광성은 그로부터 힘을 얻어 순교에 이르게 되었다. 바오로 또한 형벌과 문초를 받으면서 여러 차례 유혹에 빠지기도 했으나 마침내 1801년 7월 2일에 사형판결을 받고, 충청도 공주로 이송되어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충청도 진천의 발래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에 살던 김원중 스테파노는 본래부터 성품이 순량하고 온후하였으며, 열심과 신덕이 교우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관아에서는 발래기 신자들에게 전갈을 보내와 “천주교를 봉행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천주교 서적을 관아에 갖다 바치고 직접 관장 앞에서 다짐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대부분의 발래기 신자들은 서적을 갖다 바치고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으나, 스테파노만은 거절하였다. 1866년 11월 10일 관아에서는 다시 전갈을 보내와 “발래기 사람들은 모두 관아에 출두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스테파노를 비롯하여 10명만이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들 일행이 관아로 들어가자 관장은 일전에 갖다 바친 책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스테파노는 책을 갖다 바친 적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책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관아에서는 즉시 그를 가두어 버렸고, 이때 신성순 회장과 2명의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겁에 질려 배교를 다짐하였다. 진천 관아에서는 25일 동안 이들을 가두었다가 12월 6일에는 모두 감사가 주재하던 공주로 압송하였다.

스테파노와 일행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으며, 12월 16일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1743년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난 이도기 바오로는 고향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본래 그는 글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천주교의 덕행만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후 그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두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천주교 신앙 때문에 위협을 받게 되자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니며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가족과 함께 청양을 떠나 정산으로 이주하여 옹기점에 정착하였다. 1797년 정사박해가 발생하자, 바오로는 그 해 6월 8일 체포되어 정산 관아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으며,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 앞에서 용감하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곤 하였다. 이윽고 그는 포졸들에게 이끌려 정산 형장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배교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성모마리아님, 하례하나이다.”라고 외쳤다.

결국 바오로는 심한 매질에 의해 몸이 짓이겨져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니, 그때가 1798년 7월 24일로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하느님의 종

공주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 순교자 중에는 공주에서 순교하신 7위의 순교자가 계시다.

교회 창립 초기의 지도자로 내포의 사도라 불리우는 이존창 루도비꼬는 내포 전지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때 체포되어 서울 포청에서 한국교회의 총회장인 최창현 요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등 교회 지도자들과 사형선고를 받고 공주로 이송되어 1801년 4월 10일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경상도 출신으로 부모의 가르침으로 일찍이 입교하였다. 이들 형제는 부모와 함께 산곡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1866년 경에는 목천 소학골에 거주하고 있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10월 10일 형제가 함께 목천 포교에게 체포되었고 며칠 목천에 갇혀 있다가 공주로 이송되어 12월 14일에 형제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고선양은 부인과 아들 세명과 며느리 3명이 모두 순교한 가족 순교자들이다. 모두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고 ‘죽어도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는 신앙고백으로 장남의 나이가 25세 차남 22세 막내 며느리의 나이가 21세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선양은 병인박해 다음해인 1867년 순교하였다.

1866년 12월 24일 23세의 나이로 최종여 형제와 같은 날 순교의 칼날에 젊은 목숨을 바쳐 이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하느님 나라 영광의 빛을 전하고 있다.

고의진 요셉은 19세의 나이로 12월 14일 공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젊은 순교자의 확고한 신앙고백이 하느님의 종으로 영광의 반열에 들 날을 기다리고 있다.

중인 계급으로 회장직분을 지녔던 김화숙 베드로는 1867년 4월 9일 공주옥에서 59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