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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시대 한국교회의 심장

박해시대 한국교회의 심장인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100년간의 한국 천주교 순교 역사에서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교자들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며 고귀한 피를 흘렸던 거룩한 땅이다. 예로부터 황새들이 많이 서식하였다 하여 황새바위, 또는 죄수들이 목에 커다란 항쇄 칼을 쓰고 처형당한 곳이라 하여 항쇄바위라고도 불렸던 이곳은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순교자를 남기며 한국 천주교회의 초석이 된 순교지이다. 교회사가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공주에서 순교하신 분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그 수는 오직 천주님만이 아시느니라.”라고 밝히고 있다.

사학죄인이라는 명목으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

당시 공주에는 충청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감영이 있었다. 따라서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에서 사학죄인이라는 명목으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은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배교하기를 거부할 경우 사형판결 권한을 위임받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황새바위 앞 제민천변에서 참수 처형을 당하였다.

그곳에서 공개적인 처형이 있을 때면, 맞은편 공산성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병풍처럼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처형된 순교자들의 머리는 백성들에게 천주학을 경계시키기 위해 나무 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았으며, 시신은 일반 죄수들과 섞인 채 제민천에 버려져 금강을 순교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

또한 더 많은 숫자의 순교자들이 향옥(환옥)에서 교수(絞首 : 목을 옭아매 죽이는 것), 옥사(獄死 : 고문이나 벌 때문에 감옥 안에서 죽는 것), 아사(餓死 : 굶어 죽는 것), 매질 등으로 죽어 갔다. 교회사가 달레는 향옥에서 있었던 교수형에 대해 “옥의 벽에는 위에서부터 한 자 높이 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밧줄을 죄수의 목에 씌우고 벽의 구멍으로 내려 보내면 옥 안에서의 신호에 따라 밖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힘껏 잡아 당겨 죽인 후 시체를 밭에 버렸다.”고 묘사하고 있다.

황새바위에 순교자가 많았던 이유

황새바위에 순교자가 많았던 이유는 박해시기에 선교사가 충청도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 1861년 10월 제4대 조선교구장인 베르뇌 주교는 조선교구를 거룩한 동정 성모님께 봉헌하면서, 조선 교회 전체를 8개 사목구로 정하고 배론 신학교를 제외한 7개 지역을 성모축일 명칭으로 정하면서 전담 선교사를 임명하였다. 이때 공주는 성모영보구역으로 선포되었으며 당시 포교지 8개 구역 중 4곳이 충청도였다.

순교자들의 고결하고 용맹한 정신

순교자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다가 교회 사료들(치명일기.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한국교회사)과, 관변기록(일성록, 승정원일기, 사학징의)등 을 통하여 현재 공식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만도 337위이며, 아직도 그 이름이 밝혀지고 있는 순교자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이들 중 손자선 토마스 성인이 103위 성인품에 올랐으며, 이국승 바오로, 김원중 스테파노, 이도기 바오로가 124위 복자품에 올랐다.

또한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와 10명의 회장들을 비롯하여 남녀노소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의 칼을 받고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하였다. 순교자들의 고결하고 용맹한 정신은 오늘도 이곳 황새바위에 푸르게 살아 우리 후손들과 함께하고 있다.

※ 일성록(국보 153호) : 1752년 부터 1910년까지 151년의 기록
※ 사학징의 : 1801년 순조1년 정부측 기록을 수집 정리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