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마음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복자 이국승 바오로
이국승 바오로(1772-1801년)
"신앙을 지키는 마음을 비록 형벌을 받아 죽는다 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충청도 음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다. 충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을 듣게 된 바오로는 이 새로운 종교를 철저히 배우려고 양근 땅에 사는 권일신 프란치스코를 방문해서 교리를 배우고 교회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에 체포되어 형벌을 받다가 풀려났다.
그 후 바오로는 훈장을 하면서 천주교 신앙을 여러 사람에게 전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 되어 형조에서 최후 진술로 “지난 10년 동안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비록 형벌을 받아 죽는다고 할지라도 신앙을 지키는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 다.” 라고 하였다.
1801년 7월 2일에 사형 판결을 받고 충청도 공주로 이송되어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김원중 스테파노(?-1866년)
"주님 명에 순종하면서 살다가 죽은 후에 천당에 가서
서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오."
충청도 진천의 발래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에 살던 김원중 스테파노는 본래부터 성품이 순량하고 온후하였으며, 열심과 신덕이 교우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관아에서는 발래기 신자들에게 전갈을 보내와 “천주교를 봉행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천주교 서적을 관아에 갖다 바치고 직접 관장 앞에서 다짐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대부분의 발래기 신자들은 서적을 갖다 바치고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으나, 스테파노만은 거절하였다. 1866년 11월 10일 관아에서는 다시 전갈을 보내와 “발래기 사람들은 모두 관아에 출두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스테파노를 비롯하여 10명만이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들 일행이 관아로 들어가자 관장은 일전에 갖다 바친 책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스테파노는 책을 갖다 바친 적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책이라고 대답하였다. 진천 관아에서는 25일 동안 이들을 가두었다가 공주로 모두 압송하였다. 스테파노와 일행은 끝까지 신앙을 증거 하였으며, 12월 16일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도기 바오로(1743-1798년)
“정산 고을을 전부 주신다 해도 천주를 배반하지 못하겠습니다.”
1743년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난 이도기 바오로는 고향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본래 그는 글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천주교의 덕행만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후 그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두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천주교 신앙 때문에 위협을 받게 되자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니며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가족과 함께 청양을 떠나 정산으로 이주하여 옹기점에 정착하였다.
1797년 정사박해가 발생하자, 바오로는 그 해 6월 8일 체포되어 정산 관아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으며,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 앞에서 용감하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 하였다. 그는 포졸들에게 이끌려 정산 형장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배교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성모마리아님, 하례하나이다.”라고 외쳤다. 결국 바오로는 심한 매질에 의해 몸이 짓이겨져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니, 그때가 1798년 7월 24일로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사진출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